
분열의 시대에 대화는 정말 가능할까요.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는 그 답이 의외로 소박한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신간 『동료에게 말 걸기』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라투르를 소개한 편집자가 독서를 대화로 바꾸다
저자 박동수는 국내에 손꼽히는 철학책 편집자입니다.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와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등 묵직한 사상서들을 기획하고 편집해 왔고, 앞서 『철학책 독서 모임』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넘쳐나는 말과 글 속에서 의미를 가려내고 책과 책 사이의 연결망을 그려 온 그가, 이번에는 독서법 자체를 대화의 기술로 바꾸어 냅니다. 2025년 10월 민음사에서 나온 이 책은 말이 어긋나는 시대의 새로운 철학을 찾아 나서는 시도입니다. 저자가 내놓는 해답은 소박합니다. 먼 데의 적이 아니라 바로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그리고 빠른 비난이 아니라 느린 대화를 택하는 일입니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엇갈리는 가족, 관심사가 다른 직장 동료, 기후위기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시민을 적이 아니라 동료로 만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국내에 라투르를 처음 소개한 편집자가 그 철학을 경험의 언어로 풀어낸 책이라는 점에서, 어렵게만 느껴지던 사상이 우리 일상의 대화로 내려앉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큽니다.
무지개 깃발과 태극기 사이, 닫힌 방문 앞의 철학
이 책이 그려 내는 풍경은 지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내가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간 거리에 엄마가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상황, 각자의 무리에 숨어 서로를 미워하다가 집에 와 서먹한 얼굴로 방문을 닫는 가족의 모습 말입니다. 저자는 바로 그 닫힌 방문 앞에서 철학을 시작하자고 말합니다. 아무리 비판을 쏟아내도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그리고 집회가 끝난 뒤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의 제안은 구체적입니다. 기후 부정론자에게 과학을 믿으라고 훈계하는 대신, 우리는 기후가 두렵고 그들은 생계가 두렵다고 문장을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언어를 바꾸는 순간 상대는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의 주체가 됩니다. 서로 다른 책을 나란히 놓고 읽는 이른바 교환독서의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퀴어 비평서와 함께 읽고, 오키나와 연구서를 청년 남성 인터뷰집과 나란히 놓는 식입니다. 관점이 다른 텍스트를 마주 세우는 이 독법 자체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대화의 연습이 되는 것입니다.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에 느린 대화가 필요한 이유
이 책의 밑바탕에는 라투르의 존재론이 흐릅니다. 제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인공지능은 인간을 돕는가 아니면 착취하는가, 축산업자와 생태주의자는 연합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에는 답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각자 경험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풀리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의 양식들을 알아보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21세기의 존재론을 우리 일상에서 배우고 연습하는 장이 되기를 지향합니다. 편집자가 원고에 남긴 이 장엔 영혼이 부족하다는 날것의 코멘트, 챗지피티의 즉답과 사람 편집자의 느린 반응을 대비시키는 대목 등은,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에 왜 느린 대화가 필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줍니다. 다만 철학적 개념이 곳곳에 등장하는 만큼, 가벼운 처세서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다소 사변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학 연구자 김지효가 엄마와 직접 대화할 용기를 준다고 평했듯, 이 책의 지향은 결국 지극히 실천적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막막한 분, 그리고 분열의 시대에 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을 걸어 볼 옆자리의 동료는 누구인지, 이 책과 함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