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만에 다시 걸린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
이번 개봉은 새 영화가 아니라 재개봉입니다. '델마'는 노르웨이 출신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2017년에 내놓은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그해 가을 한 차례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6년 8월 26일, 다시 국내 극장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재개봉이 성사된 배경에는 감독의 최근 행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트리에 감독은 '리프라이즈'와 '오슬로, 8월 31일', 그리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이어지는 오슬로 삼부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습니다. 특히 2021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칸영화제에서 주연 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감독 본인도 아카데미 각본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후 발표한 '센티멘탈 밸류'가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델마'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났습니다. 감독 본인이 각본까지 직접 맡은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지금 시점에 다시 보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슬로 삼부작의 결이 궁금했던 관객이라면 이 작품을 통해 감독의 또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부작이 일상의 감정을 파고들었다면, '델마'는 초자연적 장치를 끌어들여 같은 질문을 던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장르는 다르지만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개봉이라는 형식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발작과 함께 시작된 한 소녀의 이야기
이야기는 시골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델마가 오슬로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시작됩니다. 부모의 통제 아래 조용히 살아온 델마에게 대도시의 생활은 낯설고 외롭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델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집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같은 학교 학생 안야였고, 두 사람은 그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델마가 안야에게 마음이 기울수록 발작의 강도 역시 점점 심해진다는 점입니다. 병원에서는 뚜렷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델마는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억눌러 온 욕망과 설명되지 않는 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부모가 딸에게 숨겨 온 과거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이야기의 무게중심도 옮겨 갑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공포 장르의 문법으로 풀어내면서도, 결국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성장의 이야기로 향합니다. 델마 역의 에일리 하르보와 안야 역의 카야 윌킨스가 조심스럽고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두 배우가 주고받는 눈빛과 침묵이 대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개봉 당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가 자주 언급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그 유사성은 표면적인 설정에 그치고, 이 영화가 도달하는 결말의 정서는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116분을 채우는 서늘한 공기
러닝타임은 116분이고 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초자연적 소재를 다루지만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으로 승부를 보는 영화는 아닙니다. 대신 차갑고 정적인 화면 안에 불안을 서서히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북유럽 특유의 서늘한 공기와 절제된 음악, 그리고 침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출이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트리에 감독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오히려 소리를 비워 두는 편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개봉 시점 기준 누적 관객 수는 7,853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재개봉작이자 예술영화 계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입니다. 다만 상영관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관람을 계획한다면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 두는 편이 좋습니다. 자극적인 전개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반대로 인물의 내면을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합니다. 이미 한 번 본 관객이라도 스크린으로 다시 마주할 때 인상이 달라질 가능성이 큰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후반부의 몇몇 장면은 큰 화면과 좋은 음향에서 볼 때 체감이 크게 달라집니다. 9년 만에 돌아온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조용한 여름 끝자락에 어울리는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