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위로의 문장으로 사랑받아 온 에세이스트 정영욱이 이번에는 사랑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응시했습니다. 약 2년 만의 신작 산문집 『구원에게』를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위로의 에세이스트, 사랑의 그림자 앞에 서다
저자 정영욱은 1992년 천안에서 태어나 2017년 『편지할게요』로 데뷔한 이래 해마다 산문집을 펴내며 꾸준히 독자층을 넓혀 온 작가입니다. 특히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2020년 교보문고 올해의 문장에 선정되고 50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가 되었으며,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등 제목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책들을 연이어 선보여 왔습니다. 스스로 글쓰기를 아픔을 치유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는 과정이라 표현하고, 나도 그랬었다고 말을 건네며 독자와의 동질감을 만드는 데 마음을 쏟아 온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약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구원에게』는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따뜻한 결에서 한발 물러나, 사랑이 남긴 상처와 균열, 관계의 이면에 남은 감정의 잔여를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정한 다독임을 기대하고 책장을 열었다가 서늘한 문장들에 놀라는 독자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이 변화가 반가웠습니다. 위로를 건네던 작가가 사랑의 균열을 드러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글이 한 단계 더 깊어졌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026년 2월 부크럼에서 출간되었으며 301쪽 분량의 산문집입니다. 손에 쥐기 좋은 판형에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아, 잠들기 전 몇 장씩 아껴 읽기에도 알맞은 책이었습니다.
구원에게 부치는, 부치지 못한 편지들
이 책은 사랑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 아니라 그 이면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에 시선을 둡니다. 사랑은 반드시 아름답게만 남지 않으며, 오히려 관계가 흔들리고 어긋난 뒤에야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모양의 사랑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함께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들, 말하지 못한 채 남겨진 감정들, 마음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던 질문들이 서신의 형식을 빌린 문장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제목의 구원이 편지를 받는 어느 사람의 이름처럼 읽히기도 하고, 사랑을 통해 갈구했던 구원 그 자체로 읽히기도 한다는 점이 이 책의 절묘한 지점입니다. 특히 운명에 대한 사유가 오래 남았습니다. 작가는 운명이란 신이 창조한 거대한 흐름이 아니라 고작 한 인간이 만들어 낸 일말의 감정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잠시 마주쳤거나 고작 하루를 함께한 사람이 나의 운명일 수도 있고, 나는 그 운명을 태연히 지나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라기보다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하루에 가깝고, 그래서 더 쉽게 놓치며 그럼에도 오래 남습니다. 『구원에게』는 그렇게 남겨진 마음들이 제때 쓰이지 못해 흩어지지 않도록 작가만의 언어로 붙잡아 둔, 흔적의 산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닿았다는 환상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착각 속에서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통찰 앞에서는 한참 동안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보다, 사랑하던 나의 모습이 또렷해지도록
숱한 만남과 이별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때 누군가의 세상이었고 누군가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에는 끝내 말이 되지 못한 마음들이 남기 마련입니다. 이 책이 여느 이별 에세이와 구별되는 지점은, 그 남겨진 마음을 상대를 향한 원망이나 미련으로 소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작가는 사랑했던 사람보다 사랑하던 자신의 모습이 더 또렷해지기를, 그 모든 시간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처음이 되고 누군가의 어둠을 견디며 무채색으로 변해 버린 특별함에 대한 문장들은, 이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밑줄을 긋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소식도 있습니다. 출간을 기념해 2026년 2월부터 6월까지 서울 망원동의 카페 파사도에서 북 전시가 열렸는데, 문장과 공간, 영상과 사운드가 함께 호흡하도록 꾸며져 책의 정서를 공간으로 확장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작가가 포스터와 전시 디자인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만큼 애착을 쏟은 작품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분들, 지난 관계를 어떤 언어로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아픈 문장들을 지나고 나면, 결국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신기한 독서가 될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는 그의 전작들을, 지난 사랑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필요할 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은 어떤 이름으로 남아 있는지, 이 책과 함께 천천히 되짚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