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간 2년 만에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역주행 소설이 있습니다. 읽고 나서 눈물을 쏟았다는 영상이 SNS에 번지며 화제가 된 책, 정대건 작가의 장편소설 『급류』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화감독 출신 소설가, 그리고 역주행 신화
저자 정대건은 10대에는 음악을, 20대와 30대 중반까지는 영화를 하다가 지금은 문학에 정착한 이색적인 이력의 소설가입니다.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이기도 한 그는 2020년 한경신춘문예에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아이 틴더 유』와 에세이 『나의 파란, 나폴리』 등을 펴냈습니다. 『급류』는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40번으로 나온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경쾌한 분위기였던 전작들과 달리 어둡고 무거운 이 소설은 출간 당시보다 한참 뒤에 진가를 인정받았습니다. SNS에서 읽고 나서 눈물을 흘리는 영상 등으로 입소문이 나며 2024년 9월부터 판매량이 치솟았고, 그해 연말까지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그해의 역주행 소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 독자들의 사랑이 뜨거웠는데, 빠르게 읽히면서도 완독의 만족감을 준다는 이유로 독서 입문서처럼 서로 권하는 모습을 작가 자신이 목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가가 어떤 정서에 머무르고 통과한 뒤에야 나오는 문장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이 소설의 밀도를 짐작하게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재료로 삼기 위해 지나온 힘든 시절을 곱씹고 그 시절에 오래 머물렀다는 고백에서, 이 이야기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쓰였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평의 물가에서 시작된 열일곱의 사랑
무대는 저수지와 계곡이 유명한 지방 도시 진평입니다. 소방대원 창석은 아픈 아내를 두고 딸 도담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곤 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미영과 그의 아들 해솔이 이사를 오고, 물에 빠질 뻔한 해솔을 도담이 구하러 뛰어들면서 열일곱 살 동갑내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운명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첫 만남 이후 둘은 비밀 없는 사이가 되지만, 그 첫사랑은 잔잔한 물처럼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두 아이의 부모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를 확인하러 갔던 밤에 벌어진 사고로 창석과 미영은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맙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발견된 두 사람의 죽음은 남겨진 아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내려앉습니다. 이후 도담과 해솔은 몇 번이고 서로를 놓치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합니다.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도담은 사랑을 위선이라 여기며 자신을 파괴하는 쪽으로, 해솔은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조심스러워지는 쪽으로 각자 다른 물살을 따라 흘러갑니다.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으로 나오려 하지 말고 숨을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소설 속 문장은, 그래서 수영 강습이 아니라 삶에 대한 조언처럼 읽힙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빨려 드는 것이 상처의 속성임을, 작가는 물의 이미지를 빌려 서늘하게 그려 냅니다. 첫사랑의 설렘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새 죄의식과 원망의 격류로 바뀌어 있는 전개는, 영화감독 출신다운 장면 구성 덕분에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퇴적암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곱씹게 되는 대목은 도담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 말입니다. 물에 빠지고 늪에 빠지고 함정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듯, 빠진다는 말에는 언젠가 빠져나와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신들의 세계를 통째로 휩쓸어 간 것을 목격한 아이에게 사랑이란 그토록 위험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사랑을 그렇게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을 이루는 감정은 하나가 아니며, 그래서 사랑의 성질도 다이아몬드처럼 순정한 한 가지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감정이 쌓인 퇴적암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끌림과 애처로움과 죄의식이 뒤엉킨 채로도 사람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두 사람의 오랜 시간을 통해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휩쓸고 망가뜨린 급류도 언젠가는 반드시 잠잠해진다는 것, 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몇 번이고 서로를 놓쳤던 이들이 끝내 서로의 구명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분들, 사랑에 빠지기가 두려워진 분들,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채 어둠 속을 지나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다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손수건은 곁에 두고 읽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읽고 나면 한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를 예전처럼 가볍게 발음하지 못하게 될, 그런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휩쓸고 지나간 급류도 언젠가는 반드시 잠잠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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