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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 김윤신, 전기톱을 든 여인 — 아흔한 살 조각가가 증명하는 삶의 태도

by 사리이 2026. 7. 10.

김윤신, 전기톱을 든 여인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작업실로 출근해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의 삶과 예술을 담은 책 『김윤신, 전기톱을 든 여인』을 읽고 받은 벅찬 감동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순의 현역 조각가, 그의 삶이 한 권의 책이 되다

『김윤신, 전기톱을 든 여인』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과 오랫동안 미술 현장을 취재해 온 권근영 중앙일보 미술 전문 기자가 함께 쓴 책으로, 안그라픽스에서 출간되어 2026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신간 발표 프로그램인 '여름, 첫 책'에 선정된 화제작입니다. 도서전에서는 두 저자가 직접 무대에 올라 독자들과 만나는 북 토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아르헨티나에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한 구순의 예술가, 이 한 줄의 소개만으로도 책장을 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윤신은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 때는 홀로 피란길에 올라 살아남았습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그의 아흔 해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대하드라마인데, 곁에서 오래 지켜본 기자의 취재와 작가 본인의 육성이 어우러진 덕분에 책은 위인전의 박제된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권근영 기자는 김윤신을 두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 걸었는데 그 걸음이 격동의 세계사와 맞물렸다며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유학 시절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 파리에서 배우 윤정희의 데드마스크를 떠 준 일화 같은 뜻밖의 만남들도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예술가의 평전이자 한 여성의 생애사이며 우리 현대사의 기록이기도 한, 여러 겹으로 읽히는 책입니다.

 

원산에서 파리로,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김윤신의 여정은 경계를 넘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미술 교사로 일하던 그는 먹고살기도 힘든데 여자가 무슨 예술이냐는 눈총 속에서도 1963년 말 파리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구성과 추상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여성 예술가들을 목격하며 열정에 불을 붙였습니다. 귀국 후 1970년대부터는 조각난 나무를 솟대처럼 쌓아 올린 기원쌓기 연작을 선보였는데, 서낭당 돌무더기를 닮은 그 작품들을 쌓으며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겠다고 간절히 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3년 말,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아르헨티나로 떠납니다. 이유는 놀랍게도 재료였습니다. 전쟁을 겪은 한국에는 굵은 나무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에는 알가로보와 팔로산토처럼 크고 단단한 나무가 풍부했던 것입니다. 그 단단한 나무를 자르기 위해 손에 쥔 것이 바로 전기톱이었고,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이 된 전기톱을 든 여인이 탄생했습니다. 나무를 나무답게, 돌을 돌답게 보여 주는 조각가라는 평처럼, 그는 재료 안에 존재하는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 조각이라고 말합니다. 합을 이루면 하나가 되고 나뉘어도 하나라는 뜻의 대표 연작 합이합일 분이분일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장된 사연까지, 책장마다 경이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안정 대신 재료를 택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결단 앞에서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흔에 찾아온 세계의 주목, 그러나 한결같았던 사람

김윤신의 이야기가 우리 시대에 각별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가 뒤늦게 빛을 본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40여 년간 지구 반대편에서 묵묵히 작업해 온 그는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개인전을 계기로 재조명되었고, 이듬해 국제갤러리와 뉴욕의 리만머핀이라는 세계적 화랑 두 곳과 생애 첫 소속 계약을 맺었으며, 여든아홉의 나이에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20대에 나무를 쌓으며 빌었던 기원이 90세를 목전에 두고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늦게 피어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시들지 않고 계속 피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흔한 살의 그는 지금도 매일 작업하며, 작업이 곧 삶이고 작업함으로써 오늘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그것은 밥 먹는 것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늦게 시작한 후배 예술가가 용기를 청하자 밥을 굶어도 이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기 하나만을 위해 작업하라고 답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세상의 인정은 늦게 올 수도, 끝내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매일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아흔 해의 생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느끼는 분들, 오래 해 온 일에 회의가 드는 분들, 그리고 근사하게 나이 든 어른의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힘껏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밥을 굶어도 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지, 이 책과 함께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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