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 청춘들의 필독서로 사랑받아 온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문장이 마음에 박히는 이 소설을, 이번에는 어른의 눈으로 읽으며 느낀 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필명 뒤에 숨어 세상에 나온 문제작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191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이 처음 세상에 나올 때 헤세의 이름이 아니라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이미 유명 작가였던 헤세는 기성 작가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작품 자체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실제로 이 소설은 무명 신인의 데뷔작으로 여겨져 신인에게 주는 폰타네 문학상을 받았다가 저자가 밝혀지며 상을 반납하는 일화까지 남겼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정신적 폐허 속에 있던 독일의 젊은이들은 이 소설에 열광했습니다. 전쟁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과 자신의 신경쇠약까지 겹치며 정신분석 치료를 받던 헤세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써 내려간 작품이기에, 시대의 상처와 공명하는 힘이 남달랐던 것입니다. 훗날 헤세는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작품 세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전환점이 바로 『데미안』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부제인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가 말해 주듯, 이 소설은 한 소년이 소년기를 지나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여정을 담은 성장의 기록이며,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낡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십 종의 번역본이 꾸준히 출간되며 세대를 이어 읽히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 고전이라 하겠습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그리고 데미안이라는 인도자
주인공 싱클레어는 경건하고 반듯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소년입니다. 그의 유년은 두 세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의 기도와 사랑이 있는 밝고 올바른 세계, 다른 하나는 하인들의 험한 소문과 거리의 폭력이 있는 어둡고 금지된 세계입니다. 열 살 무렵 싱클레어는 불량한 소년 크로머에게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허세를 부렸다가 약점을 잡혀 괴롭힘을 당하고, 처음으로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이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그를 구해 준 사람이 전학생 막스 데미안입니다. 또래답지 않게 성숙하고 신비로운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뒤집어 해석하며 싱클레어가 굳게 믿어 온 세계에 균열을 냅니다. 선악의 이분법 너머를 보라고, 금지된 것을 두려워하지만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이후 성장한 싱클레어는 방황과 타락, 베아트리체를 향한 동경,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를 거치며 조금씩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이상적 존재인 에바 부인을 만나고, 마침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신 안에 이미 데미안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도자를 따라가던 소년이 스스로 인도자가 되는 구조가 무척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데미안이라는 인물의 신비로움에 매료되었다면, 다시 읽을 때는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끝내 자기 길을 찾아가는 싱클레어의 안간힘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 들어 보았을 문장이 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로 시작하는 바로 그 구절입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며, 새는 신에게로 날아가고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는 이 대목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을 모두 품은 신성을 뜻합니다. 헤세는 이 상징을 통해 인간이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밝은 면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둠까지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읽은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가라는 도전의 책이었다면,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데미안』은 깨어진 세계 속에서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위로의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다는 것. 남들이 정해 준 규범과 기대라는 껍질에 안주할 것인지,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깨고 진짜 나로 태어날 것인지 이 소설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정답을 강요하는 시대, 남과 비교하며 흔들리기 쉬운 시대이기에 오히려 지금 읽어야 할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읽어도 좋지만, 무언가를 깨고 나아가야 할 갈림길에 서 있는 분이라면 지금이 바로 이 책을 펼칠 때입니다.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 주말 이틀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분량이니, 올여름 독서 목록에 꼭 넣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깨뜨려야 할 알은 무엇인지, 이 책과 함께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