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유튜버 '콜미진', 이경진 작가의 첫 장편소설 『리치먼드힐의 이층 버스』를 읽었습니다.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가 된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20년의 꿈을 이룬 유튜버 콜미진의 첫 장편소설
저자 이경진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승무원으로 살아가며, '콜미진'이라는 이름으로 이민자의 일상과 시선을 기록해 온 40만 구독자의 유튜버입니다. 단순히 책 읽는 것이 좋아 문예창작과에 진학했고 그때부터 막연하게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스물셋에 캐나다라는 낯선 나라에 발을 내디딘 이후 그 꿈은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20년 넘게 소설가를 꿈꿔 온 그가 2024년부터 틈틈이 써 내려간 이야기를 오랜 고민 끝에 다듬어, 2026년 6월 마침내 첫 장편소설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발매 직후 교보문고 소설 부문 주간 베스트셀러 1위, 국내도서 전체 부문 2위에 오르며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유명 유튜버의 책이라는 점이 화제성에 한몫했겠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이 소설의 힘이 단지 저자의 인지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작가는 오랜 세월 지켜본 캐나다의 아름다운 경관을 섬세하게 묘사해 마치 눈앞에 캐나다가 펼쳐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가족과 이민 생활의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내 이야기의 결을 촘촘하게 만들었습니다. 말로 다 담기지 않아 마음속에 쌓여 온 이민자의 이야기들이 비로소 소설이라는 그릇을 만난 셈입니다. 오랜 시간 품어 온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이뤄 낸 저자의 이력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와 묘하게 겹쳐 보여서, 책을 읽는 내내 더욱 각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 그리고 과거로 가는 이층 버스
이야기의 무대는 캐나다의 조용한 마을 리치먼드힐입니다. 이 작고 평화로운 도시에 한국인 부부 민정과 철수, 그리고 아들 타미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예상치 못한 사고로 타미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민정은 병원에 누워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버스에 오르는데, 절망 속의 그녀 앞에 어느 날 수상한 이층 버스 한 대가 멈춰 섭니다. 버스에서 내린 민정은 남편 철수를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모습으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합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 철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 보면 다시 아들이 있는 병원 앞입니다. 이후 민정은 계속해서 이층 버스를 타고 과거로 향합니다. 철수를 처음 만난 봄날로, 아버지를 피해 동네를 서성이던 어린 시절로, 엄마와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 갔던 날로 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버스가 민정을 행복했던 시절로만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정은 가장 기뻤던 순간을 다시 느끼는 동시에 가장 어둡고 불행했던 순간과도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와 기억에 맞닿으며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과연 민정은 자신과 타미의 삶을 바꿀 수 있을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단풍잎이 물드는 리치먼드힐의 풍경과 토론토의 거리, 외할아버지의 시골집 같은 공간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읽는 것만으로 캐나다를 여행하는 듯한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간여행의 외피를 쓴, 상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과거로 돌아가는 버스가 멈춰선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질문을 던집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란 있을까,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러나 이 소설이 단순한 시간여행 판타지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처음에는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처럼 보이던 서사가 끝에 이르면 결국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민정은 과거를 다시 살아 보며 깨닫습니다. 좋았든 나빴든 그동안의 여러 선택들의 결과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찾기 위해,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타미를 되살리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담담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 이야기인 만큼 얼마든지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도, 작가는 눈물을 강요하지도 독자를 억지로 흔들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문장을 쌓아 올려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릴 뿐입니다. 섬세한 묘사와 예상을 뒤엎는 전개 속에서,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자식인 독자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음이 무뎌진 분들에게는 진실한 감동을, 인생의 무게에 지친 분들에게는 따뜻한 치유를 건네줄 소설이라 자신 있게 권합니다. 잊고 있던 감동을 되찾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이경진이라는 새로운 이야기꾼이 지닌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앞에 이층 버스가 멈춰선다면 어느 날로 돌아가고 싶으신지, 이 책과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