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토로와 치히로가 태어난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전 필름 코멘트 편집장이 10개의 장에 걸쳐 그 원천을 추적한 책, 니콜라스 라폴드의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세계』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필름 코멘트 편집장이 그려 낸 영향의 지도
저자 니콜라스 라폴드는 미국의 영화 평론가이자 프로그래머입니다. 유서 깊은 영화 잡지 필름 코멘트에서 15년간 몸담으며 편집장까지 지냈고, 스파이크 리와 로버트 패틴슨, 줄리엣 비노슈 같은 인물들을 인터뷰해 왔습니다. 현재는 더 라스트 싱 아이 소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뉴욕 타임스와 사이트 앤 사운드,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등에 글을 쓰고 있고, 뉴욕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강의했으며 전미비평가협회 회원이기도 합니다. 링컨 센터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서 영화 프로그램을 기획해 온 이력까지 더하면, 미야자키 하야오를 다루기에 이보다 적임인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원서는 더 월즈 오브 하야오 미야자키라는 제목으로 2025년 9월 영국 프랜시스 링컨에서 출간된 224쪽 분량의 책이며, 국내에는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세계』로 옮겨져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공인되지 않은 비공식 저작이면서도 통상적인 평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는 점입니다. 생애를 순서대로 훑는 대신, 한 창작자가 무엇을 보고 읽고 흡수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영향과 원천의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야자키가 중세 건축이나 원시림에 대해 남긴 강연문까지 빠짐없이 읽었다고 밝히는데, 그가 실제로 보고 언급한 것만을 근거로 삼겠다는 원칙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삐삐 롱스타킹부터 도고 온천까지, 원천을 찾아서
이 책의 구성은 무척 짜임새 있습니다. 열 개의 주제별 장으로 나뉘고 각 장이 다시 네 개의 작은 절로 갈라지는 방식이라,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첫 장인 거울 너머로 가는 네 가지 길은 루이스 캐럴과 미야자와 겐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과 요시노 겐자부로, 다이애나 윈 존스처럼 어린 미야자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작가들을 다룹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요한나 슈피리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가도노 에이코와 생텍쥐페리, 안데르센과 나쓰메 소세키 등 그의 작품 속 씩씩한 소녀 주인공들에게 영감을 준 이들을 짚어 갑니다. 개인적으로 감탄한 대목은 구체적인 출처를 하나하나 확인해 낸 저자의 성실함이었습니다. 삐삐 롱스타킹이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해적선을 이끄는 할머니로 되살아난 경위, 마쓰야마의 도고 온천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환상적인 온천장으로 변모한 사연 같은 것들 말입니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가 『벼랑 위의 포뇨』의 한 장면과 겹쳐 놓이는 지면에 이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일본의 민담과 유년의 기억에서 유럽의 건축과 고전 영화, 그리고 정치적 발언에 이르기까지 그 출처의 폭이 워낙 넓어, 익숙하게 보아 온 장면들이 전혀 새로운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한 장면 뒤에 이토록 두꺼운 독서와 관찰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브리의 세계가 왜 그토록 견고하게 느껴졌는지 비로소 납득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물성, 그리고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물성입니다. 인터시티 스튜디오가 디자인을 맡아 일본의 전통적인 세로쓰기 방식에서 착안한 그래픽 언어를 적용했고, 해리엇 리 메리언의 표지 일러스트와 질감이 살아 있는 색면 구성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소장하고 싶은 책이 되었습니다. 영화 스틸과 원천이 된 이미지를 나란히 배치하는 편집도 탁월해서, 글을 읽지 않고 도판만 넘겨 보아도 즐겁습니다. 아름답게 설계되고 우아하게 쓰인 책이며 작품별 안내서를 넘어선 조용한 사색이라는 해외의 평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미야자키의 사생활이나 스튜디오 지브리 내부의 갈등을 파헤치는 폭로형 평전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분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고, 이미 알려진 작품 해설을 다시 만나는 대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과 비행, 소녀성과 저항과 재생이라는 그의 반복되는 주제들이 어디에서 흘러들어 왔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상상력이 결코 무에서 솟아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넘어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에 관심 있는 분, 그리고 지브리를 사랑해 온 모든 분들께 자신 있게 권합니다. 좋아하던 작품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재관람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책장을 덮자마자 오래된 지브리 영화 한 편을 다시 틀게 될 테니, 주말 저녁을 넉넉히 비워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은 어떤 이야기들로부터 흘러왔는지, 이 책과 함께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