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코의 미소』와 『밝은 밤』으로 사랑받아 온 소설가 최은영이 데뷔 13년 만에 첫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소설 뒤편에 가려져 있던 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책, 『백지 앞에서』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소설 뒤에 서 있던 사람, 처음으로 앞에 나서다
최은영은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로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동시에 받은 작가입니다. 이후 『내게 무해한 사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장편 『밝은 밤』까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섬세한 문체로 견결한 소설 세계를 쌓아 왔습니다. 상처를 극복해 내는 영웅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 온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던 독자가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궁금증에 대한 응답처럼, 등단 13년 만의 첫 산문집 『백지 앞에서』가 2026년 4월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2024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써 내려간 여섯 편의 새 원고에 기존에 발표한 네 편을 고치고 더해 완성한 열 편의 산문이 담겼는데, 한 편 한 편이 단편소설에 가까운 긴 호흡으로 이어지며 최은영 특유의 정서적 중량감을 고스란히 전해 줍니다. 손끝만 스쳐도 구겨질 것 같은 새하얀 표지가 제목과 어우러져, 책의 물성마저 백지 앞에 선 마음을 닮아 있습니다. 소설로 먼저 만난 독자에게는 작품의 결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 왜 많은 이들이 이 작가를 아끼는지 자연스레 납득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출간 직후 여러 매체와 서점가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북토크가 이어졌을 만큼, 오래 기다려 온 독자들의 반가움이 큰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편한 데까지 써 보자는 결심
이 산문집을 관통하는 것은 놀라운 솔직함입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보이기 싫은 마음에 대해 썼으며, 진실하지 못할 거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가장 불편한 데까지 써 보자고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결심대로 책에는 작가가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다시 혼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이른바 유기 불안 때문에 착취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시절의 기록, 어린 시절부터 오래 이어진 외모에 대한 강박,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병원을 오가야 했던 겨울, 그리고 결혼과 이혼으로 이어지는 개인사까지, 소설가라는 직함 뒤에 있던 인간 최은영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상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은 자신을 죽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강하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어떤 상처는 마음의 구조를 원하지 않는 모양으로 비틀고 사람을 덜 믿게 만들었다는 문장 앞에서 저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상처를 성장의 재료로 미화하는 흔한 서사를 거부하고 아픔을 아픔 그대로 인정하는 이 정직함이야말로, 이 책이 여느 에세이와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깨달음으로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는 취약함을 글로 썼다는 이유로 조롱받는다 해도 진실을 감추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는데, 그 문장에 담긴 용기가 읽는 사람에게도 조용히 옮겨 오는 듯했습니다.
백지 앞에서, 글쓰기는 사람을 살리는 일
표제작 「백지 앞에서」에는 뜻밖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다고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백지 앞에 설 때마다 초심자가 되는 마음, 첫 책이 좋은 평가를 받은 뒤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오히려 불편했던 기억까지, 작가는 글쓰기를 둘러싼 두려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 쓰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음속에서 소화되지 않던 감정이 해소되는 경험을 했고, 글쓰기가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삶을 추동하고 치유하는 글쓰기의 의미를 이 책만큼 절실하게 보여 주는 산문집도 드물 것입니다. 이십 대 초반에 대학 여성주의 교지 편집부에 들어간 작은 결정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이야기, 고양이 한 마리를 사랑했을 뿐인데 세상 모든 동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고백처럼, 인생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국 자그마한 무엇이라는 통찰도 반짝입니다. 동물권과 세월호 참사 같은 사회적 아픔을 지나며 생각한 것들도 담담하게 담겨 있습니다. 주저하고 실패하고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람의 글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의 아름다움은 매끈함이 아니라 정직한 울퉁불퉁함에 있습니다. 취약함을 감추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 믿어 온 분들께, 그리고 백지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있는 모든 쓰는 사람들에게, 이 용감하고 하얀 책을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백지 앞에 선다면 가장 먼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이 책과 함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