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가 산문집 『산곡미풍』으로 돌아왔습니다. 제목은 '산골짜기의 산들바람'이라는 뜻으로, 역사와 사회를 향하던 시선을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기억으로 돌린 이 책을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반평생의 기억을 꺼내다
위화는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나 1983년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래, 『인생』, 『허삼관 매혈기』, 『형제』, 『원청』 등을 통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중국 민중의 질긴 생명력을 그려 온 작가입니다.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화한 『인생』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적인 '위화 현상'을 일으켰고, 지금은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중국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명실상부한 거장입니다. 『산곡미풍』은 그런 위화의 반평생이 고스란히 담긴 산문집입니다.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부터 삶의 굴곡을 지나 원숙한 시선에 다다른 2020년대까지, 약 사십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써 내려간 글들이 한 권에 묶여 있습니다. 이 책이 탄생한 계기가 무척 낭만적입니다. 2024년 휴가차 방문한 하이난에서 문득 마주한 시원한 산들바람이 그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지난 시간들을 깨웠고, 그 기억을 따라 써 내려간 표제작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전거 한 대 보이지 않던 1960년대 농촌 마을 하이옌에서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정은, 소설가 위화가 아니라 인간 위화의 일생이 담긴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늘 이야기 뒤에 숨어 있던 작가가 직접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는 점만으로도 오랜 독자에게는 각별한 책입니다.
골짜기의 바람이 깨운 기억들, 소년 위화와 아버지
책장을 넘기면 위화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시원한 바람을 찾아다니던 땀 냄새 밴 어린 시절, 바닷물이 푸르게 변하는 먼바다까지 헤엄쳐 가고 싶었던 무모한 소년 시절, 의사였던 부모님 곁에서 보낸 약 냄새 가득한 병원의 나날과 정겨운 농촌의 풍경까지, 그는 기억을 매개로 지나온 시간 속에 숨어 있던 감정과 의미를 천천히 되짚어 갑니다. 광란의 문화대혁명 시절, 격동의 세월 한복판에서 대자보를 읽으며 문학의 싹을 틔웠던 소년의 모습은 우리가 무언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읽을 것이 귀하던 시대에 오히려 이야기를 향한 갈망을 키워 낸 셈이니, 한 작가의 기원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었습니다. 위화는 의사였던 아버지를 엄격하고 무뚝뚝한 존재로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거리감을,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느낀 기쁨과 불안, 그리고 책임감에 대한 고백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흐르는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며 깊은 공감을 자아냅니다.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온 시간들이 담담한 문장 속에 펼쳐지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국경과 세대를 넘어 누구나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담한 유머 속에 스며드는 삶의 위로
위화의 문장은 이번에도 여전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외로움을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냅니다. 친구의 눈물과 장례식장의 슬픔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읽어 내는 시선은 이 산문집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그의 소설이 늘 그러했듯, 기쁨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일상을 담담하고 유머러스한 어조로 돌아보는 글들은 읽는 이에게 깊은 위로와 안도를 건네줍니다. 소설가 장강명이 그의 문장을 두고 등 뒤를 쓰다듬는 골짜기의 산들바람 같은 진솔한 위로라고 표현한 것도 과장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위화는 이 책에서 거창한 인생론을 설파하지 않습니다. 다만 삶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줄 때 그것은 대부분 뚜렷하지 않아서 받고 난 뒤에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며, 어떤 손 모양으로 받느냐에 따라 얻는 것도 달라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나는 어떤 시간을 지나쳐 왔는가, 그 시간에는 어떤 의미와 선물이 숨어 있었는가. 이 책은 독자에게 그런 질문을 남깁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결국 앞으로를 잘 살아 내기 위한 일이며, 탁월한 이야기꾼인 위화에게 기억이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삶을 다시 한 번 살아 보는 일입니다. 온갖 부대낌 속을 살아가며 지쳐 있는 소시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바로 위화의 글이 지닌 힘입니다.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바람 같은 위로가 필요한 분들께 이 책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기억 갈피에도 시원한 산들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