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우주를 바라볼 때 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간 작가가 있습니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이 5년간 전국의 광산과 폐광을 누비며 길어 올린 640쪽의 기록, 『쇳돌』을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워진 목소리를 좇는 예술사회학자, 이라영
저자 이라영은 미술과 예술 경영을 공부한 뒤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미국에서 여성과 소수자 인권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온 예술사회학 연구자입니다.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폭력의 진부함』, 『말을 부수는 말』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차별과 혐오 구조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며 이름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자고 말해 온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2026년 2월 동녘에서 펴낸 신작이 바로 『쇳돌』입니다. 쇳돌은 철광석을 뜻하는 우리말이자, 강원도 양양광업소의 노동자들이 캐고 고르던 광석의 이름입니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저자의 개인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어딜 가도 형사가 따라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신원조회에 번번이 걸려 먹고살기 위해 강원도 양양까지 흘러들었고, 그곳 양양광업소에서 노동조합을 이끌었으며, 고모는 광석을 고르는 선광부로 일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두고 지역 노동계층 여성, 수복지역, 연좌제 문제까지 모든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개인사 속에서 엮어 낸 이전 작업들의 총합이라고 말합니다. 부제인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가 이 책의 지향을 정확히 압축합니다. 거친 쇳돌을 손에 집어 든 듯한 질감을 살린 표지 또한, 이 책이 다루는 세계의 무게를 촉감으로 전해 줍니다.
5년의 발품으로 캐낸 막장 인생의 역동성
『쇳돌』을 쓰기 위해 저자는 5년간 충청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의 광산과 폐광을 찾아다녔습니다. 광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여러 번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말문이 열리기를 진득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채굴한 이야기들이기에 이 책은 죽음과 질병과 서러움이라는 뻔한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흔히 막장 인생이라 폄하되어 온 그 삶의 역동성과 구체적인 목소리를 길어 올리는 데 집중합니다. 세상은 막장이라 불렀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안방이었던 광산,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캐 올렸던 노동의 존엄이 640쪽에 걸쳐 복원됩니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한국 사회가 외면해 온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조명하는 대목이 인상 깊습니다. 광부 곁을 지킨 이른바 광부댁들, 광석을 골라내던 선광부 여성들의 이야기가 차분하고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책은 자문화기술지와 문학 비평, 그리고 후반부의 르포가 위화감 없이 직조된 독특한 구성을 취하는데,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떠받쳤던 산업 전사들이 어떻게 소리 없이 사라져 갔는지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 보입니다. 다만 저자는 상투적인 신파의 문법을 따르는 대신, 감정을 절제한 채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앞세워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서로 연대하며 온기를 나누었는지를 담담히 그려 냅니다. 그래서 이 두툼한 기록은 무겁되 결코 침울하지만은 않습니다.
사라지는 노동의 시대에 다시 묻는 존엄
『쇳돌』이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묵직한 물음표를 던지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혁명이 회자되는 시대에, 평생직장은커녕 직업과 삶의 터전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산업 역군으로 불리다 어느 순간 쓸모를 다한 존재로 취급되며 사라져 간 광부들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섬찟하게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라지는 노동이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일깨웁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4부의 목소리들, 들을 수 있을 때 듣기였습니다. 광부로 살았고 지금도 현장을 지키는 이들, 그리고 그들 곁을 지킨 이들의 육성이 담긴 이 대목은, 이 기록이 과거의 비극에 박제되지 않고 현재의 삶과 따스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서울과 주류 담론에서 멀어지는 불안 속에서도 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기를 택한 저자의 우직함이, 그 자체로 이 책이 지키려 한 가치와 겹쳐 보입니다. 두께가 만만치 않고 소재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시대의 필독서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책입니다. 잊힌 노동과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분들, 우리 부모 세대가 통과해 온 시간이 궁금한 분들, 그리고 두툼한 벽돌책 한 권을 완독하는 묵직한 성취감을 원하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읽고 나면 지하 깊은 곳의 어둠에서 빛을 캐 올렸던 이들에게, 저절로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곁에서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목소리는 무엇인지, 이 책과 함께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