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희경 작가가 『빛의 과거』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을 읽고 그 감상과 작품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예순다섯 살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과 몸, 노년과 죽음을 사유하는 이 소설은 올해 한국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년 만에 돌아온 은희경, '시간 3부작'의 대미
『시간의 감촉』은 은희경 작가가 장편소설로는 『빛의 과거』(2019) 이후 무려 7년 만에 내놓은 신작입니다. 계간 문학동네에 2024년 가을호부터 2025년 가을호까지 연재했던 원고를 오랜 개고의 시간을 거쳐 다듬어 펴낸 작품입니다. 연재 당시의 제목은 '저녁의 감촉'이었으나 출간 과정에서 보다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의 감촉'으로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데뷔작 『새의 선물』과 『빛의 과거』를 잇는 이른바 '시간 3부작'의 마지막 책이라고 밝혔습니다. 『새의 선물』이 삼십대의 주인공이 자신의 열두 살 시절을 반추하는 이야기였고, 『빛의 과거』가 오십대 후반의 주인공이 사십 년 전 청춘을 되짚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육십대 중반에 이른 두 주인공이 살아온 시간 전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이야기입니다. 세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작가가 자신의 생애 주기를 따라가며 시간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심화시켜 왔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발견과 성장의 여정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세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소설은 문장이 철저하게 현재형 시제로 쓰였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의 소설이 이미 지나간 일을 서술하는 과거형 시제로 쓰이는 것과 달리, 현재형 문장은 독자가 책을 읽는 바로 그 순간 눈앞에서 인물이 움직이고 사건이 벌어지는 듯한 생생한 시간 감각을 만들어 냅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감촉으로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은희경 특유의 날카롭고 세련된 문체와 현재형 시제가 만나 제목 그대로 문장으로 시간을 만지고 맛보게 하는 소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다른 자매, 안나와 경선이 다시 만나기까지
소설의 두 주인공은 같은 해 1월과 12월에 태어난 자매 안나와 경선입니다. 둘 다 예순다섯 살이고 겨울에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도 외모도 살아온 궤적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언니 안나는 걸을 때 어깨를 움츠릴 만큼 손발과 골격이 크고 무거운 책을 샅샅이 파고들며 읽는 사람이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온 퇴직 연금 생활자입니다. 반면 동생 경선은 아기 때부터 눈에 띄게 예뻤고 다양한 책을 가볍게 훑어 읽는 편이었으며, 결혼과 출산과 이혼을 모두 겪은 뒤 교정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비밀을 나누던 가까운 자매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사이가 갈라졌고, 심지어 그 갈라지기 시작한 날들조차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만나지도 않던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곳은 다름 아닌 병원입니다. 경선의 건강검진에서 신장 종양이 발견되면서 안나가 예정에 없던 보호자가 되어 동생을 간병하게 되고, 나아가 경선의 어린 손녀 다니엘까지 돌보게 되면서 안나의 고요하던 일상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소설은 총 4부에 걸쳐 두 자매의 현재에서 출발해 젊은 시절의 사랑과 결혼, 가족의 기억을 거쳐 안나와 경선, 다니엘 세 사람이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나아갑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이란 결코 정확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시각과 그때의 정서로 편집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오해에서 이해로, 오랜 어긋남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이 여정이야말로 이 소설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년과 몸,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이 소설의 출발점에는 '몸'이 있습니다. 작가는 한 사람의 몸 안에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담겨 있으며, 몸이야말로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삶이 머무는 최후의 거처라고 말합니다. 시간은 몸에 지층처럼 쌓여 결코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흔적이 되는 동시에, 강물처럼 흘러 손안에서 이내 말라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노화한 몸에 새겨진 시간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노년을 그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노년의 인물을 뭉뚱그려진 '노인'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개인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고, 그래서 안나와 경선이라는 두 노년 여성을 최대한 다르게 그렸다고 합니다. 식당에서 손님이 아니라 노인으로 취급받는 데 불만을 터뜨리고, 나이 때문에 연애소설 교정 일감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경선의 모습처럼, 이 소설은 사회가 젊음에만 가치를 두는 시선에 균열을 냅니다. 그러면서 늙음 자체도 괜찮다고, 노년 역시 긴 삶의 여러 단계 가운데 하나이며 다른 모든 단계가 그렇듯 이 단계에도 새로움이 있고 삶의 저녁에 맞이하는 모든 '첫' 순간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대한 사유도 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왕국을 이루어 계속 살아 있으며, 그 진실과 사랑이 지켜져 훗날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시간을 이어 달리는 계주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나이 듦이 두려운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책이 지나온 시간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