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페이지 한국사 365』와 『단박에 한국사』 시리즈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심용환이 이번에는 신화라는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신화의 역사』를 읽고, 신화를 역사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역사학자 심용환은 왜 지금 신화를 이야기하는가
저자 심용환은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자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로, 단단한 학문적 기초 위에서 방송과 강연, 저술을 통해 시민과 호흡해 온 역사학자입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며 대중적인 역사서를 꾸준히 써 온 그가 이번에 선택한 주제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신화'입니다. 오늘날 신화는 인간미 넘치는 신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그리스 신화나, 망치를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마블 영화 속 토르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래전부터 신화가 왜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가라는 질문을 탐구해 왔고, 이제 신화 자체의 역사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화가 수천 년간 살아남아 시대를 초월해 반복적으로 읽히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어 온 까닭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신화를 분석하는 것은 곧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며, 역사를 보다 깊은 관점에서 해석하는 행위입니다. 현대인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서사의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이 인간의 고통과 문명의 위기에 답을 주지 못할 때마다 우리가 신화라는 오래된 지혜의 창고를 다시 열어 보곤 했다는 저자의 진단은, 인류 최초의 거대 서사인 신화가 지금 다시 주목받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신화와 그 역사를 읽는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새로운 방법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에서 중국까지, 문명이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책은 총 5부에 걸쳐 세계의 신화를 역사라는 거대한 맥락 안으로 통섭해 내는 야심 찬 항해를 시도합니다. 1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시작해 헤시오도스와 아폴로도로스가 신들의 계보를 완성해 가는 그리스 신화를, 2부는 오딘과 토르로 대표되는 게르만 신화와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에 민족의 발견과 결합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3부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영웅신화와 이집트의 종교 신화를, 4부에서는 구도자의 신화인 인도와 신화가 없는 문명이라 불리는 중국을 살펴보고, 마지막 5부에서는 인류학과 철학, 종교학의 관점에서 신화학 자체를 조망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통념을 뒤집는 대목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인도 신화의 특징으로 익히 알고 있는 구도자적 고행이 정작 인도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나,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에서 신화가 다른 방식으로 흡수되고 약화되었다는 분석이 그렇습니다. 이 책은 신화의 존재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각 문명이 자신을 어떤 이야기로 정당화했는가라는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전쟁과 영웅, 건국과 죽음, 귀환 같은 사건들이 단순한 줄거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조직하는 장치였다는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익숙했던 신화들이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의 익숙한 독법을 넘어 세계 여러 문명의 신화를 하나의 지도 위에 펼쳐 놓는 구성 덕분에, 각 문명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 또한 상당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답을 만들지만, 인간은 신화를 만든다
이 책의 미덕은 신화를 역사 바깥의 환상으로 밀어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신화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상징 체계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신화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역사와 정치, 문화가 만나는 장소로 읽힙니다. 저자는 신화에 나타나는 사랑과 죽음, 복수와 귀향 같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집중합니다. 바다 위를 떠돌던 오뒷세우스의 방랑이나, 사촌 형제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슬픔 외에 어떤 보상이 있느냐고 탄식하며 왕위를 버리려 했던 『마하바라타』 속 유디슈티라의 모습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왜 신화를 버리지 못하는가. 인간은 사실만으로는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억을 이야기로 바꾸고, 고통을 의미로 바꾸며, 사건을 공동체의 서사로 만들어 냅니다. 인공지능이 답을 만들어 내는 시대에도 신화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통찰은 오래 곱씹게 됩니다. 재미있는 신화 모음집을 기대한다면 다소 밀도가 높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화가 발생하고 변형되는 원리를 추적하는 인문 교양서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책입니다. 영화와 정치, 영웅담 속에서 오늘도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싶은 분들께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계신지, 이 책과 함께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