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 추천 | 아코디언 — 천명관, 폐허의 서울에 울려 퍼지는 생의 선율

by 사리이 2026. 7. 8.

아코디언

 

『고래』의 작가 천명관이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아코디언』을 읽었습니다. 전쟁 직후 1950년대 서울의 뒷골목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이 소설을 읽고, 오래 남을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부커상 최종후보 작가, 10년 만의 귀환

천명관은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해 『고래』,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을 발표하며 독보적인 이야기꾼으로 사랑받아 온 작가입니다. 특히 첫 장편 『고래』는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한국문학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그런 그가 2016년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이후 무려 10년 만에 신작 장편 『아코디언』을 창비에서 펴냈습니다. 그 사이 그는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2022년 영화 「뜨거운 피」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남은 삶은 결국 소설을 쓰며 보내겠다는 다짐으로 문학에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이 작품은 2012년 창비 블로그에 '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이야기를 상당 부분 개작한 것으로, 집필과 개작에만 3년이 걸린, 작가 스스로 가장 지난하고 힘들었다고 고백한 작업의 결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방향 전환입니다. 신화적 상상력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던 『고래』와 달리, 이번에는 현실의 불평등과 착취, 부조리를 담기 위해 뻗어 나가는 상상력을 일부러 억제하며 사실적인 리얼리즘으로 썼다고 합니다. 시나리오를 쓰던 습관 덕분에 풍경과 행위가 영화의 지문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읽는 내내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308쪽의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마지막 장까지 멈출 수 없는 몰입감만큼은 그의 어떤 전작에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해방촌, 동이와 거리의 아이들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흙먼지가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의 춥고 비정한 서울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동이는 피란길에 엄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부모와 집, 심지어 이름까지 잃어버린 고아 소년입니다. 찌그러진 깡통을 앞에 두고 가루눈을 맞으며 거리에 엎드려 있던 동이는 위선적인 양 목사가 거느리는 앵벌이 조직의 움막에 흘러듭니다. 해방촌 판자촌의 그곳에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소녀 연이, 걷지 못하는 대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거북이, 한쪽 팔을 잃은 쓰리꾼 깜상, 그리고 미군 기지촌을 능청스럽게 누비는 하우스보이 미키까지, 저마다 결핍을 안은 아이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갑니다. 양 목사의 착취와 폭력, 아이들을 옭아매는 약물 구름탄의 유혹 속에서 이들의 세계는 잔혹하기 그지없지만, 소설은 비참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동이가 고물 더미에서 낡은 아코디언을 주워 들고,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서 노래하기 시작하면서 구걸은 공연이 되고 폐허는 무대가 됩니다. 목포의 눈물, 홍콩 아가씨, 베사메무쵸 같은 옛 가요들이 각 장의 제목으로 흐르는 가운데, 생존기는 어느새 성장과 연대의 서사로 확장되어 갑니다. 전후 서울의 냄새와 소리와 빛이 되살아나는 묘사 속에서, 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숨을 붙들고 살아가는 장면들은 뭉클함을 넘어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아코디언은 죽음의 반대말이다

작가는 왜 하필 아코디언이었을까 궁금했는데, 기자간담회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집시의 시간」을 언급하며 아코디언 소리에 깃든 집시적인 슬픔이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가장 어울린다고 설명했고, 소설 속 면도칼이 죽음을 뜻한다면 아코디언은 그 반대말, 곧 살아남으려는 생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숨을 토해 내는 이 악기처럼, 소설은 구겨진 삶의 주름 속에서 가장 뜨거운 리듬을 길어 올립니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이 이 작품을 두고 잊힌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며 올리버 트위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평한 것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작가가 굳이 70년 전의 서울을 소환한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분단이 고착된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로 권력을 잡는 이들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한국전쟁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사라지고 혐오가 가득한 시대에 공감이야말로 문학의 역할이라고 믿는 작가의 진심이, 책을 읽다가 울컥해서 잠시 책장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과 겹쳐지며 오래 남았습니다.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을 그리워하던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소설이며, 『고래』로 천명관을 처음 만났던 분들에게는 전혀 다른 얼굴의 천명관을 발견하는 반가운 재회가 될 것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허 속에서도 끝내 노래를 멈추지 않았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뜨거운 리듬으로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