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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 자본의 무덤 — 조디 딘,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봉건주의를 살고 있다

by 사리이 2026. 7. 13.

자본의 무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자본주의일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 낡은 무언가로 퇴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의 정치이론가 조디 딘의 신작 『자본의 무덤 — 신봉건주의와 새로운 지배 질서』를 읽고, 이 도발적인 질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의 이론가, 조디 딘

저자 조디 딘은 미국 호바트 앤드 윌리엄 스미스 칼리지의 정치학 교수로, 우리의 소통과 참여 자체가 자본의 회로에 포획되었음을 짚어 낸 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개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정치이론가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마크 피셔 같은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좌파 이론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고, 국내에는 월가 점유 운동과 이론을 잇고자 했던 『공산주의의 지평』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도권 정치보다 변혁적 정치의 원리와 동력을 현장에서 사고하려는 이론가라는 평가답게, 그의 글은 강단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세계를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자본의 무덤』은 그런 조디 딘이 내놓은 최신작으로, 2025년 영국 버소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국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 하승우 번역가의 손을 거쳐 2026년 7월 11일 이상북스에서 한국어판으로 나왔습니다. 부제인 '신봉건주의와 새로운 지배 질서'가 책의 문제의식을 압축합니다. 흔히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를 묻는 질문에 우리는 더 발전된 무언가를 상상하지만, 딘은 정반대의 진단을 내놓습니다. 자본주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를 닮은 질서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간 직후 손에 들었는데, 올여름 가장 서늘한 독서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론서치고 위압적이지 않은 분량이지만, 담긴 문제의식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플랫폼 영주와 디지털 농노, 신봉건주의의 풍경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신봉건주의는 은유가 아니라 진단입니다. 딘이 보기에 오늘날 경제의 중심은 상품을 만들어 이윤을 얻는 생산이 아니라, 플랫폼과 자산을 틀어쥐고 통행료를 걷는 지대 추출로 옮겨 갔습니다. 거대 테크 기업들은 중세의 영주처럼 디지털 영지를 소유하고, 우리는 그 땅 위에서 검색하고 배달하고 클릭하며 살아가는 농노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앱에 종속된 채 일감을 배당받는 플랫폼 노동자,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원의 규칙, 국가의 기능을 잠식하며 사적 권력으로 군림하는 빅테크까지, 딘은 주권이 파편화되고 지배가 사유화되는 풍경을 봉건제의 귀환으로 읽어 냅니다. 화려한 성채 같은 대도시와 버려진 배후지로 갈라지는 공간의 양극화, 그리고 만성적인 불안과 종말론적 정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상까지도 이 진단 안에서 하나로 꿰어집니다. 읽는 내내 한국 사회의 풍경이 겹쳐 보여 여러 번 책장을 멈추었습니다. 배달 앱과 플랫폼에 생계를 의탁한 노동, 자산 소유 여부로 갈리는 계급, 수도권이라는 성채와 소멸하는 지방까지, 대서양 건너의 이론이라기에는 너무나 우리 이야기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어딘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막연한 감각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입니다. 이름이 생기면 비로소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니, 신봉건주의라는 개념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읽는 유용한 렌즈가 되어 줄 것입니다.

 

무덤을 파는 자는 누구인가, 새로운 계급투쟁의 요청

제목인 자본의 무덤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자들을 낳는다고 했던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딘의 물음은 한층 서늘합니다. 자본주의가 무덤에 들어간 자리에 저절로 더 나은 세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면 신봉건주의라는 더 나쁜 질서가 그 무덤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진단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지배 질서에 맞설 새로운 계급투쟁을 요청합니다. 공장 노동자가 옛 자본주의의 주역이었다면, 돌봄과 배달과 서비스로 살아가는 오늘의 방대한 하인 계급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딘의 제안입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으로 자각하고 조직될 때에만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은, 조합과 정당과 연대의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물론 좌파 이론서 특유의 밀도가 있어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며, 진단의 과감함만큼 반론의 여지도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불평등과 플랫폼 권력, 청년의 체념과 지방의 소멸이 왜 하나의 문제인지 궁금했던 독자에게는 드물게 시야를 넓혀 주는 독서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언어가 없어 답답했던 분들, 그리고 뉴스 이면의 구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이 뜨겁고 불온한 책을 권합니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인상 깊게 읽으셨던 분이라면 자연스러운 다음 책이 될 것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의 이름 아래 살고 있는지, 이 책과 함께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