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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 - 박상영,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다

by 사리이 2026. 7. 25.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

 

한국 퀴어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가 70대 재벌 여성의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반대말 같은 작품이라 부른 박상영의 신작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랑 3부작을 떠나보내며, 등단 10년 차의 도전

저자 박상영은 1988년 대구에서 태어나 성균관대에서 프랑스어문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소설가입니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1차원이 되고 싶어』, 『믿음에 대하여』로 이어지는 이른바 사랑 3부작을 통해 한국 퀴어 문학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특히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2022년 한국 작가 가운데 최연소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롱리스트에 오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믿음에 대하여』 역시 그가 직접 각본을 쓰며 영상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등단 10년 차를 맞아 소설로는 4년, 장편으로는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 바로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입니다. 래빗홀에서 출간된 이 작품은 그의 이전 소설들과 결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성소수자와 청년과 사랑이라는 자신의 대표적인 키워드를 스스로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기존과 전혀 다른 작품을 써 보자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재희와 대도시의 세계를 떠나보내려 한다고, 그 작품은 평생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겠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다른 이야기가 많다고도 했습니다. 잘되는 자리에 안주하는 대신 스스로 벽을 세우고 넘어 보려는 태도가, 이 작가를 계속 지켜보게 만드는 이유일 것입니다.

 

세일백화점의 회장을 찾아가라는 유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새 소설의 주인공은 1950년대에 태어난 70대 재벌 여성입니다. 성별도 연령도 시대적 배경도 작가 자신과는 공유하는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니, 스스로 표현한 대로 나의 반대말 같은 작품을 써 보자는 시도의 결과인 셈입니다. 그만큼 취재의 밀도도 남달랐습니다. 여러 부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역사적 사실을 공부해 가며 하나의 세계관을 새로 세웠다고 하니, 상상만으로 채운 재벌가 이야기와는 출발부터 다릅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하나가 어머니로부터 세일백화점의 윤동주 회장을 찾아가라는 유언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 한 문장을 실마리 삼아 재벌가의 암투와 치정, 오래 묻혀 있던 비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모든 사연이 현대 한국 경제사라는 배경 위에서 펼쳐집니다. 분노와 욕망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생애를 따라가는 이 이야기는 명백한 장르 소설의 문법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밀도만큼은 그가 여태 써 온 소설들의 것 그대로였습니다. 백화점이라는 무대 또한 절묘합니다. 화려한 진열대 뒤편의 노동과 계급, 욕망과 허영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간이니,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을 비추기에 이보다 적합한 배경도 드물 것입니다. 첫 장면부터 유언 한 줄로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솜씨 역시 능란해서, 도입부만 읽고 책을 덮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가장 호화로운 왕관이 실은 지푸라기였다면

제목이 곧 이 소설의 주제입니다. 머리 위에 얹힌 왕관이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푸라기로 허술하게 엮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 그것이 이 작품이 도달하는 자리입니다. 손을 대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왕관을 쓰기 위해 한 사람이 무엇을 내어놓았는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부와 권력을 좇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그 정점에 올라선 자가 자신이 쥔 것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순간을 이토록 집요하게 그려 내는 소설은 드뭅니다. 물론 이 작품에는 아쉬움을 느낄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재희와 대도시의 세계를 사랑해 온 분들에게는 작가가 그 세계를 떠나보내겠다고 선언한 것이 서운하게 다가올 수 있고, 순문학의 서정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장르적 전개의 속도에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되는 순간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한 작가가 자신의 성공한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낯선 땅에 깃발을 꽂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귀합니다. 재벌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흡입력 있는 장르 소설을 찾는 분, 그리고 박상영이라는 작가의 다음 챕터가 궁금한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영상화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이니, 미리 읽어 두시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겠습니다. 익숙한 이름을 내려놓고 새로 출발한 작가의 첫걸음을 함께 지켜보는 즐거움도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쓰고 있는 왕관은 무엇으로 엮여 있는지, 이 책과 함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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