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누구도 믿지 말라고 말하면서, 정작 무엇이든 나누고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역설을 파고든 인류학 명저, 오가와 사야카의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를 읽고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와힐리어를 익히고 중고옷을 팔며 연구한 인류학자
저자 오가와 사야카는 1978년생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입니다. 그의 이력은 학자라는 단어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스물세 살 대학원생 시절부터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드나들며 스와힐리어를 익혔고, 마칭가라 불리는 영세 상인들에게서 직접 중고옷 파는 장사를 배우며 그들의 삶과 관습을 참여 관찰해 왔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시장 한복판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연구해 온 셈입니다. 이후 동아프리카의 중고품 유통과 홍콩·중국과 아프리카를 잇는 비공식 교역을 연구해 온 그는, 현재 리쓰메이칸대학 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홍콩의 청킹맨션에 체류하며 그곳에 사는 탄자니아인들의 비즈니스와 삶을 관찰해 펴낸 보고서로, 국내에는 2025년 6월 갈라파고스에서 지비원 번역가의 손을 거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과 가와이 하야오 학예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17쇄 넘게 증쇄를 거듭하며 새로운 인류학 고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런 인류학도 있구나, 압도적으로 재밌다는 반응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줍니다.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 그리고 수상쩍은 공동체
무대가 되는 청킹맨션은 홍콩 중심가 네이선로드에 자리한 낡은 건물로, 흔히 홍콩의 마굴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흘러든 사람들이 뒤섞여 저마다의 장사와 삶을 꾸려 가는 이 건물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이곳에 체류하던 중 자칭 타칭 청킹맨션의 보스라 불리는 카라마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그를 실마리 삼아 이 공동체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SNS를 활용한 상거래, 지하 은행, 밤 문화, 아프리카계 브로커들이 얽힌 무정부적 시장까지, 이곳의 비공식 경제는 우리가 아는 제도권 경제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돌아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태도입니다. 이런 필드워크 연구는 자칫 외부자의 피상적이고 딱딱한 시선에 머물기 쉬운데, 오가와 사야카는 집단 안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내밀한 문화를 함께 겪어 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중심인물 카라마는 딱딱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마치 소설 속 조르바처럼 생생하고 매력적인 한 사람으로 살아 숨 쉽니다.
믿지 않아도 연결되는 사회라는 상상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청킹맨션의 사람들은 수없이 배신을 경험한 탓에 세상의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아무도 배제당하지 않고 무엇이든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오히려 유연하게 공존하는 기묘한 커먼즈적 삶의 방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광경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호혜와 증여, 분배 같은 인류학의 고전 이론들을 뒤흔듭니다. 신뢰와 안전을 기반으로 삼는 근대적 사회 시스템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믿지 않아도 연결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이 발견은 불확실성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상상력을 던져 줍니다. 다만 인류학 보고서인 만큼 이론적 논의가 깊어지는 대목에서는 다소 밀도가 높게 느껴질 수 있고, 명확한 결론보다 질문을 남기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관계와 신뢰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분들께는, 이보다 흥미로운 독서가 드물 것입니다.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인류학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지, 이 책과 함께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